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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 (多寶塔)
과 무영탑
(無影搭)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김대성이라는 분이 이룩한 것이다. 김대성은 천하의 유명한 석수장이는 다 불러서 불국사
뜰에
탑을 세웠다.
그
때 먼 곳에서 아사달이라는 석수장이가 오게 되었다. 아사달은 그야말로 탑을 세우는 데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사달은 고향에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다. 단 둘이서 구차하나 의좋은 그 내외는 아사달이가 떠난 후 매일같이 아사 녀는 사랑하는 남편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나 애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하여 하는 수 없이 아사녀는 애인을 찾아 나섰다.
약한
몸으로 수 천리 머나먼 곳에 있는 애인을 찾아 가기는 그리 쉬운일이 아니었다.
아사녀는
온갖 고생을 다 겪고 만고풍상을 지나고 수 개월 만에 겨우 불국사에 이르렀다.
너무나
먼 길이었다. 참으로 온갖 괴로움을 겪고 몇 달 만에 닿게 된 불국사! 아사녀는
<
여보! 여보! 내가 당신 찾아 왔어요.! >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너무나 반가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가장 사랑하는 애인이 계시는 불국사, 생각만 해도 그립던 곳에 비로소 닿은 것이다.
그러나 애인을 찾아 불국사로 가자 뜻밖에 험상궂게 생긴 문지기가 앞을 가로 막았다.
<
여기는 못들어가! 지금 큰 일을 하는데 여자는 얼씬도 못하는 거야 >
부정
탄다고 호통을 쳤다. 아사녀는 앞이 깜깜했다. 아는 사람이라곤 한 사람도 없는 타향에 다만 애인 한 분을 바라고 찾아온 것을 못 만나게 하다니
너무나 야속했다.
<
잠시라도 만나게 해주세요. >
아사녀는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하여 보았다. 그러나 문지기는 들은 척도 안했다.
여러번
사정도 하고 악을 쓰고 발악도 하다가 나중에는 마치시람 같이 날뛰는 것을 본 험상궂게 생긴 문지기가 동정하였는지, 귀찮아서 속이는 말인지,
<
이공사장에는 아무런 사정이 있다 해도 여자는 못 들어가니 여기서 십리 떨어진 남쪽에 가면 못이 있고, 그 못에는 이곳 공사장 모습이 비칠
터이니 그곳에서 이 공사장 공사가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라. > 고 일러 주었다.
아사녀는
너무나 박정한 말이었으나 할 수 없는 일이라 하는 수없이 탑 공사가 하루바삐
끝마치기를
축원하면서 못으로 찾아갔다. 못 위에 완성된 다보탑의 그림자는 보이나 공사 중이라는 석가탑의 그림자는 아무리 나타나기를 기다렸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사녀는 그만 미쳐 올바른 정신을 잃고 어느 날 여보! 여보! 하면서 못가를 헤매이다 못 위에 나타난 다보탑의 그림자를 사랑하는 애인인
줄 알고 못 가운데로 뛰어들어가 애인을 부르면서 빠져 죽고야 말았다.
머나먼
고향에서 아내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아사달은 한 시가 열흘같이 일각이 천추같이 밤 낮으로 일을 서둘러 석가탑의 완성을 보았다. 그립고 그리운
애인을 만나려고 못으로 뛰어 갔으나 못가에는 아사녀가 보이지를 않았다. 초조와 공포로 못가를 헤매며 아사녀를 불렀으나 빈 바람소리와 물결치는
파도 소리만이 고요히 들리었다. 며칠을 방황하던 어느 날 하루는 소나무 사이에서 아사녀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달려가 끼어안고
<
아사녀야! 아사녀! >
하고
불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을 것이 그것은 사람이 아니고 큰 바위였다.
그래서
아사녀가 죽을 줄 알고 된 아사달은 그 바위에다 아사녀의 모습을 새겨 명복을 빌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그 돌부처는 기운을 잃고 우울한 빛이
돌았다. 뒤에 이 돌부처를 중심으로 영사라는 절이 서게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조그마한 암자가 있어서 옛일을 상상하게 한다. 이로인하여 이못을
영지라 하고, 다보탑을 유영탑,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과 유래깊은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 나라 국보 제20호 및 제21호로서 만인이 앙시하는 문화재로 한국의자랑이며 높이 평가할 정신의 자산이다.
백결 선생 (百結先生)
과 음악
(音樂)
신라
시대 낭산 기슭에 아주 구차한 선비 음악가가 살고 있었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옷을 백 군데나 기워 입고 다니기에 별명이 백결 선생이 되었다.
평소에
욕심이 없고 법이 없어도 사는 착한 분이다.
항상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거문고를 잘 타기에 거문고라면 백결 선생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기분이 좋을 때나 괴로울 때나 불평이 있을때는 언제나 거문고를 탔다고 하는데, 어느 해 그 해도 저물어 갈 무렵 이웃에서 떡찧는
방아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왔다. 그러나 백결 선생 집에는 떡은 고사하고 저녁쌀도 없는 형편이라 부인은 마음이 몹시 괴롭고 걱정한 나머지 백결
선생을 보고
<
남들은 모두 떡을 찧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없으니 어떻게 설을 지내며 어찌 살란 말이요 > 하면서 걱정 하였다.
백결
선생은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태연히 하시는 말씀이 < 사람이 죽고 사는 것도 다 명이 있는 것이고, 부귀도 하늘이 주는 것이요,
상심할 것이 어디 있소. 내 당신을 위하여 떡찧는 절구소리를 지어서 위로해 드리리다! > 하면서 거문고로 절구소리를 지어 탔다고 하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거문고를 잘 탄 유명한 예술가로 이름이 남게 되었다.
한평생을
예술에 몸을 바쳐 청빈한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이씨 시조 (李氏始祖)
와 표암
(瓢巖)
경주
이씨의 조상이 하늘에서 내려온 옛터라고 하는 표암은 경주시에서 동북으로 약 2km 소금강산 남쪽 논호림으로부터 동으로 경주시 동천동 에 있다.
이곳에는 비각을 세우고 제장까지 만들어놓아 이씨 문중에서 신성시하고 있는 곳이라이 암산을 표암이라 함에는 세 가지 전설이 돌고 있다.
1.
알천 양산촌의 촌장인 이 알평공의 강탄지라고 전하여 오는데, 약 150여년 전에 비석을 세웠고 평지의 건물은 근년에 세운 것이다.
2.
바위가 드러남은 서울에 해를 끼친다 하여 표주박을 심었더니 그 잎이 퍼지면서 바위를 덮었다는 말이 있다.
3.
다음은 표공이 동해에서 건너 울적에 허리에 찬 표주박을 이곳에서 풀었다 하는데, 이 표공은 박 혁거세왕을 도와 나라의 기초를 세운 지혜와 용맹을
겸한 장부였다고 한다. 또 단기 2315년(BC.18) 표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일이다. 마한 왕이 표공에게,
『
너의 나라는 원래 우리 나라 속국인데 어찌하여 공물을 보내지 않느냐! 너의 놈들은 예의를 모름이 심하니 이후에 만약 반성하지 못하면 그대로
두지를 않을 것이다 !』
수십
명의 병졸이 좌우로 늘어서 가운데 위엄 있는 호통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쯤으로 겁을 낼 표공이 아니었다. 미소를 띠우며,
『
우리 서라벌의 임금님은 하늘이 도와 나라를 이룩하셨으며,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고 나라일에 힘쓰시어 먼 나라일지라도 모두 우러러볼
따름입니다.
그러하되
거절함이 없이 옛정의를 지키어 우리 사신을 보냈거늘 도리어 신을 대함이 이다지도 무례하시오! 위협을 가한다고 두려워 굽힐자 서라벌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요.』
이와
같은 늠름한 태도로 답변을 하였다. 마한 왕은 크게 노하여 칼을 뽑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좌우 대신들의 말림으로 내전으로 들어가고 말았다.표공이
다녀 온 후로는 마한은 신라를 모욕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 용맹하고 지혜가 많은 표공이 경주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약사여래
입상(藥師如來立象)
이
약사여래상은 지금은 박물관에 있으나 원래 백률사에 있었던 불상이다. 이 불상의 영험에 대하여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2대 효소왕때에 대현살찬의 아들 부례랑을 선발하여 국선, 즉 화랑으로 삼앗다.
낭도는
약 천 명가량 되었으나, 그 중에 절친한 동무는 안 상 뿐이었다. 부례랑은 어느 날 낭도를 데리고 여행을 갔다가 북쪽 국경지대에 이르렀을 때
돌연 적병을 만나 그들에게 사로잡혀 가게 되었다. 낭도는 모두 겁을 내어 도망쳤는데 안 상이 홀로 동무의 신변을 생각하고 그 뒤를
따라갔다.
이것은
서기 693년, 즉 효소왕 2년 3월 11일 이었다.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한탄하여 말하되 『선왕 이 신적과 현금 을 얻어 천존 고에 비장
하시고, 세상 모든 재액이 없어진다 하시었는데, 오늘날 국선을 도적에 사로잡힌 바 되니 이 어인일 인고.』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현존 고에는
서운이 덮이는지라 왕은 또한 놀라 곡간 안을 조사시켜 본즉 국보인 거문고와 저 가 둘다 없어졌다.
왕은『아아
국선을 잃자 국보를 잃었으니 짐의 부덕은 망극함이여』하고 대단히 슬퍼하는 한편 사고리 김정고 등 다섯 명을 가두고 말았다. 사월에는 하는 수없이
나라 안에 『거문고와 저를 찾는 사람에게는 한해의 조를 상으로 주겠다.』 하고 널리 공포하였으므로 국내는 매우 소란하였다. 부례랑의 양친은
날마다 백률사 약사여래 불상을 찾아가 기도를 올렸는데 5월 15일에 또한 성심으로 기도를 올리다가 본즉 향탁 위에 분실된 국보 거문고와 저가
얹혀있고 여래상 뒤로부터 부례랑과 안 상이 나오므로 양친은 한편 놀라고 한편 기뻐하여 어찌된 연고를 물었더니 부례랑이 답하기를,『제가 적에게
사로잡혀 가서 대도구라 하는 집의 마소를 먹이는 종이 되어 대오라니 라 하는 들에서 풀을 먹이고 있었더니 용모가 거룩한 노승이 손에 거문고와
저를 들고 가까이와 하는 말이『고향이 그리우냐?』하기에 앞에 나아가 꿇어앉으며 『임금님과 부모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하루가 천추 같습니다.』하고
쓰러져 애원을 하였더니『그러면 나를 따라오라』하기에 그 뒤를 쫓아 가니 어느 바닷가에 이르러 안 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노승이 저를 쪼개어
배 두 척을 만들어 주므로 우리는 각각 한 척씩 타고 노승은 거문고를 타고 큰 바다를 건너 이 곳에 왔습니다. 양친은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반가와 하시며 사자를 시켜 부례랑과 안 상을 맞이하고 백률사에는 패금을 내리고 국내에는 은사를 내리는 동시에 3년간의 조세를 경감하였다.
그리고 부례랑은 대각간으로,그의 부친 아찬대현 을 태대각간으로, 모친 용보부인을 가량부 경정궁주로 봉하고, 안상을 대통으로 삼았으며, 그리고
5명의 사고리 는 면죄할 뿐 아니라 각각 벼슬 5급을 올려 주었다.
그
후 6월 12일에 혜성이 동방에 비치고 17일은 서방에 비치니 일관이 점을 쳐 아뢰기를,『금적 에는 어찌 벼슬이 없었을까?』하기로 곧 신적을
만파식적이라 하였더니 그제야 혜성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 예례상은 조상의 명수로 존경 받은 당나라 사람의 작품이라 하는데 그의 이름은 알지
못하나 그 제능의 비범과 인격의 고걸로 그 성명을 부르지 않고 모두들 신장 님 이라고만 불렀다.
이
신장님이 어찌하여 신라에 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 당시 당나라 황제에게 천하 일색인 어여쁜 따님이 있었다.
꽃과도 같고 달과도 같은 딸의 모습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고자 우수한 화공을 뽑아서 그 모양을 그리기로 되었는데 그 영광에 뽑힌 자가 바로
신장님이었다. 신장님은 전력을 기울여 아리따운 공주의 모습을 그렸었다. 그림이 공주와 다름없이 아리따움에 따라 신장의 마음 속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신장의 완성된 그림에다 자기도 모르게 화필을 떨어뜨렸다. 이상하게도 붓 끝은 공주의 배꼽 밑에 떨어져 점을 찍고 말았다.
신장은 당황히 붓을 들어 그 점을 없애려고 애를 썼으나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나 보였다. 다시 그리려고 하였으나 도저히 이만큼 그릴 수가 없을것만
같았다. 붓을 들고 싶지도 않았다.신장은 화운이 이뿐인가 홀로 탄식하다가 지워지지 않는 그 자리에 필시 험이 있는게로구나 결심하고 황제께 그대로
그림을 올리었다. 황제께서는 그림을 받아보더니 대단히 만족하여 『과연 내 딸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조그맣게 다문 입,정기가 빛나는 까만
눈동자,도화색 같은 ? 그런데 이것은 웬일이냐? 내 딸 배꼽맽에 있는 험은 그 누가 알았으며 누가 그리라고 하였더냐? 네가 그리 잘 안다면 간밤
몽중에서 내가 본 사람의 모습을 그려 들여라.』엄명을 받고 신장은 곧 십일면 관세음보살을 그려 바쳤더니 바로 맞았으나 조금도 노염이 풀어지지
않았는데, 좌우에 있던 대신들의 조언으로 용서를 받게되었다. 난경을 넘은 신장은 긴 한숨을 내 쉬면서 대궐을 나오는데,『여보게 이사람』하고
어깨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았더니 그는 다정한 친구인 박사 분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만나려던 참일세, 마침 잘
만났네,나는 이번에 혼이 다 빠져서 느낀 바도 많았네, 대관절 우리 나라는 대국이라면서 인심이 모두 부처님 같고 기술 가진 사람이면 더욱
환영한다 하니 나는 그 땅에 가 살고싶은데 자네도 같이 가지 않으려나?』이렇게 하여 두 사람은 신라에 왔다고 한다.
손씨 시조
(孫氏始祖) 와 석종 (石鐘)
신라 시대에 서울(경주)에서 태어난 손 순은 손씨 시조이며, 그 후손들은 경주, 밀양, 평해,로 분파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주
박물관 종각의 현판에 보면 월성 삼기종 이라는 말이 있는데, 즉 박물관에 있는 신종과 황룡사에 있었다는 큰종과 이 돌종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삼기종의 하나인 돌종이 나온 유래는 이러하다.
신라
제 42대 홍덕왕 시대에서 서울 한 구석에 구차 하나 부부가 뜻맞고 의좋게 근근히 살아가는 한 농가가 있었다. 식구는 위로 늙은 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그날 그날을 지내고 있었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 손씨의 시조인 손 순이라고 하며, 부모에게는 효성이 지극하여 비록 없는 살림살이나마 언제나 장날이면 나무를 지고
장에 가서 팔아서 돌아올 때는 반드시 고기 반찬을 사서 늙은 어머니를 봉양 하였다.
그러나
구차한 살림이라 자기 내외와 어린 아이에게는 고기 반찬이 잘 돌아가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철 모르는 아이는 할머니 밥상을 떠나지 않고, 또 늙은 할머니 역시 손자를 귀엽게 여기어서 늘 밥상 곁에 두고 상을 받을 때 마다 고기를
손자에게 주곤 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손 순이가 생각하니 늙은 노모를 위한 효도가 어린 아이에게 가고 어머니에게는 효성이 보람이 적고 보니 어느날 내외가 의논한 나머지
어린아이는 또 얻을 수 있으나 늙은 어머니는 한 번 가시면 다시는 뵈옵지 못하리니 우리의 효성이 방해 되는 이아이를 없애자고 내외가 의논한 뒤
밤이 깊은 어느 날 아내는 사랑하는 아이를 업고 남편은 괭이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아이를 묻고자 땅을 괭이로 파는 도중에 괭이 끝에 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나기에 파고 보니 이상하게도 돌종 한 개가 나왔다.
그
어머니는 그렇지 않아도 사랑하는 어린 아이를 차마 묻기 어려워 하던 차이라 쓸쓸하고 가슴이 아픈 그 때 그종을 보고 놀라면서 하는
말이
'
이것이 야 말로 참말 이상 하외다. 이 어린 아이를 묻지 말라고 하느님이 구원하려는 신조인가 생각됩니다. 이곳에서 어찌 이런 돌종이 나올리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종을 쳐 보니 묘한 종소리가 울렸다.
이리하여
손 순은 다시 아이를 아내에게 업히고 자기는 괭이 자루에 종을 걸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그 돌종을 집 처마에 달았더니 바람결에 울리는 묘한 종소리는 멀리 대궐까지 들리고, 성 안에는 소문이 자자하였으며, 임금님께서도 알게 되매 이는
효성이 지극함이라 하고 나라에서 표창을 하고, 상으로는 집 한채와 쌀 50석을 받게 되었다.
이것을
고이 전하기 위하여 이곳 동명 까지 종동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후인들이 손 순의 효자비를 이곳(월성군 현곡면 소현리)에 세우고, 또 동명을
고쳐서 효자리라고 하였다.
지금은
그 자리에 그 당시의 유래를 기록한 비석만이 쓸쓸이 길가에 서 있어 오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다시 한 번 멈추게 하고 있다. 그 후에 시호로서
문효공이라 봉하고, 본집터에는 홍효사라는 절이 서게 되었다.
눈먼 어머니와 효녀(孝女)
지금으로부터
약 1060년 전 신라 서울에서 일어난 이야기로서, 신라 진성 여왕때 어느 봄날 서울의 남산 기슭 포석정에서 그 당시 여러 남도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
모임에 지각하여 뒤떨어져 온 낭도가 두 사람있었다.
그
때에 이름이 높던 화랑 효종랑이 그 두 사람에게 지각한 까닭을 물으니 낭도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분황사
동네로 지나오다가 어느 조그만 집에서 너무도 슬픈 울음 소리가 나기에 그 집 안을 들여다보니 한 이십세 가량되어 보이는 여자가 눈먼 어머니를
붙들고 통곡 하는지라 그 이유를 동네 사람에게 물으니, 이 분황사 동네에 연권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 집이 몹씨 가난하였다. 연권이 오랫동안
시병으로 자리에 누워 앓고 있었으나 어린 딸 지은이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아내의 힘을 입을 수도 또한 없었으니
그 아내가 눈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한술
밥이 그들의 차지에 돌아오기 어려웠거든 하물며 한 방을 약이야 바라 수 있으랴.
그리하여
그 가엾은 연권은 눈먼 아내와 딸 지은이를 거친 이 세상에 모르는 듯이 남겨 두고 다시 못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모진
것은 목숨이라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울고만 있기보다도 끼마다 닥쳐오는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는 눈먼 어머니를 외로이 집에 남겨 두고라도 어린
딸 지은이는 거리 거리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엇다.
한술
두술 밥이 그릇에 차기 전에 지은이는 바쁜 걸음으로 돌아와 눈먼 어머니와 마주 앉아 찬밥도 더운 듯이 쓴 장도 단듯이 먹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어느 부자집에 고용살이로 들어가 날이 저물도록 일을 하고 밤이면 돌아올 때 쌀을 조금씩 받아서 가져다 어머니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올리게 되었다.
'
어머니 오늘 저녁은 밥맛이 좋아요? 어머니 많이 잡수셔요 녜.'
'
오냐! 아가 너도 많이 먹어라 하루 종일 얼마나 배고프고 괴로웠겠니 ?'
이렇게
이야기하며 저녁밥을 마친 뒤에야 웃으며 그날의 일과를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낙이었고, 새벽이 되기까지 서로 안고 깊은 잠을
이루는 것이 다시 얻지 못할 즐거움이었다. 집집이 돌아다니며 한술씩 얻어다 눈먼 어머니를 봉양할 때보다는 쌀을 되로 받아 오고 되를 모아
말로 받아다가 더 운 밥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이 어린딸 지은이에게는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눈먼 어머니는 항상 불쌍한 저 딸이 죄많은 나를 위해서 땀 흘리며 애쓰는 것이 애처럽고 불쌍하여 딸 지은이가 나간 후도 홀로 눈물 짓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지은이는 어머니를 존경하고 눈먼 어머니는 딸을 지극히 사랑하며, 어머니가 흑흑 느끼면서 울 때 지은이도 어머니 무릎 위에 엎드려 울면서 서로
위로한다.
'
어머니 어머니, 이 하늘 아래서 어머니 밖에 모실 이가 또 어디 있겠읍니까? 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하여도 어머니 마음이 편안하신 그것만이
소원이 옵는데 저는 조금도 괴롭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우시면 저도 눈물이 납니다.'
'
어머니 제가 하는 일은 조금도 힘들지 않으니 염려마셔요. '
이
말 한 마디에 어머니와 딸은 다시 한 번 같이 울었다. 딸은 눈먼 어머니의 얼굴을 우러러보며 울고 다시 울고 눈먼 어머니는 딸의 머리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울고 또 울며 자기들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 길가에까지 들린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화랑 효종랑은
'
우리 나라 서울에 불쌍한 사람도 많고 부모에게 효성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지금 들은 지은이의 일이야말로 참으로 눈물겹다. '
하며
조 백 석을 보내니 다른 여러 낭도들이 나도 나도 하여 조 천 석을 거두어 보냈다. 이 이야기가 드디어 궁중에까지 들어가 진성여왕은 쌀 오백
석과 집 한채를 주었으며, 그 효도를 표창한 후 그 동네를 개칭하여 효양리라 하고 그들이 있던 집은 절로 고치어 양존사라고 하였다.
김 후직
(金后稷) 의 간묘 (諫墓)
경주역에서
북으로 가면 가장 가까운 숲, 지금 경주의 공설 운동장이며 가장 경치가 좋고 공기 좋은 논호림, 일명 고성 숲이 있다.
여기에서
북으로 약 200m 가자면 밭복판에 고분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김 후직 충신의 무덤이다. 거기 세운 비석은 약 260여 년전의 것이라고
한다.
동경잡기를
보면, 신라 시대일이다. 26대 진평왕이 나라의 일을 소홀히 하고 다만 매일같이 사냥으로 날을 보내므로 김 후직은 여러 가지로 말씀을 드렸으나
도무지 듣지를
않으시고
도리어 웃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관직에서 쫓겨 나왔다.
그리하여
김 후직은 정사를 걱정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기에 이르렀다.
그때
그 김 후직은 자손들에게 죽으면서 유언하기를, 『 나는 신하로서 마땅이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것이니 죽은 뒤에 장사는 예법에 갖추어서 잘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임금님께서 사냥 다니시는 길가에다 묻도록 하여라. 』
그의
아들들은 이 말과 같이 돌아가신 후 임금님이 매일같이 사냥다니시는 길가 밭에다 묘를 썼다.
임금님이
지난날과 조금도 다름없이 사냥하러 말을 달리는데 김 후직의 묘 앞에 이르러 돌연 말이 걸음을 멈추는데 어디서인지 이상한 말이 들렸다.
『임금님께서는 부디 사양을 말아 주십시오.』
거듭거듭
들이었다. 왕은『이상한 소리에 놀라며 그 소리 나는 곳을 찾아보았더니 소리는 김 후직의 무덤에서 들리었다. 그 후 왕은 후직의 죽을 때 남긴
말이며 살아서도 나라일을 걱정하던 이야기를 듣게 되자,
『그는
살아서는 충신이었고 죽은 뒤 영혼까지도 충간하는 충신이니 내 어이 그대의 말을 쫓지 않으랴."』
하고
다시는 사냥을 다니시지 않고 나라의 일에 힘을 썼다고 하는데 후일 이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이 묘를 신라간신 김 후직 묘라는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삼기종(三奇鐘) 과 성덕대왕 신종 (聖德大王
神鐘)
신라
시대에 유명한 삼기종이 있었다. 그 중 제일 큰종이 황룡사 종이요 길이가 약3m, 두께가 약 30cm무게가 약 29만 4천kg이나되었고 그 종
소리는 기묘하였으며, 지금 남아 있는 신종(에밀레종 또는 봉덕사종)보다도 약 4배나 더 무거운 큰종이 예술계에 찬연하며 대대손손 만방에자랑으로
빛날 것이냐. 애석하겟 왜인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이 종을 보고 탄복하여 일본으로 가져가다가동해에서 뱃사람 할 것없이 다 침몰되었다고 전하여
지금도 가끔 파도소리에 따라 종소리가 울려 온다는 말이 있다.
하나는
돌종 으로 소리가 기묘한 것이라 한다. 이 종도 지금은 흔적조차 없으나 그 종의 이야기는 돌종란에 미루고 남은 종, 즉 현재 박물관에 남아 있는
신종이다. 서기 1927년(단기 4260년) 5월 21일 독일 국립 박물관에 계셨고 세계적을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
이것은 세계 제일이다. 독일에 이런 종이 있다면 이것 하고 말하고 간 것을 보더라도 이 종이 얼마나 훌륭한 종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그 종의 특징이 구조는 그만 두고 이 종이 아우이신 경덕왕이 35대 임금으로 왕위 오르시어 선왕의 뜻을 이어 큰 종을 봉납하고자 국내의
유명한 공장에게 그 주종을 명하였으나 성공을 못 보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제
36대 혜공왕이 선왕의 뜻을 받아 6년이나 걸려 혜공왕 7년 12월에 이 종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즉,
이 종을 만들어 내기까지에는 세 임금과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으며, 서기 771년(단기 3104)에야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종이
완성되기 까지에는 몇 번이고 고쳐 만들었으며 허다한 곡절이 있었다. 있는 재주와 있는 힘을 다하여 만들어 놓은면 큰 금이 가기도 하고 혹은
소리가 나지를 않기도 하고 또 몇 번이나 만들고 부수고 또다시 만들고 또 부수기를 거듭하였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공장은
피로와 근심으로 핏기가 없고 국왕은 국왕대로 노하였다.
백성들은
이 무슨 흉조인가 하여 수군수군하였다. 이 때 공사를 맡은 이상택 일전은 고민과 한숨 중에 완성시킬 기일이 내일로 박두하였다. 일전은 일찌기
황용사의 29만4천kg(즉 49만근)이나 되는 큰 종을 무난히 주 조한 인물이며 국내 제일의 명공으로 자타가 다 인정하는바 만들어지 유래를
소개함으로써 이 종이 신기하고 훌륭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라
제 34대 효성왕이 돌아가신 부왕 33대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봉덕사를 지으시고 주종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
이제는 이세상에 자기의 기술이 부족함이 폭로됨은 물론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는 죄송스런 마음에서 벌을 받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날 생각도 한두
번이 아니요, 수심 깊은 안타까운 마음 고민과 피로에서 무거운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전의 집에는 일찌기 남편을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있는 누이 동생이 가난한 오빠의 집에 돌아와 쓸쓸하고 외로운 세상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부터 오빠를 생각하는 누가 와서 있는 부정이
아닌가 하여 밤낮 걱정이 되며, 혹은 여자의 힘으로 어떻게 오빠의 힘이 될 수는 없을까 날마다 저녁때면 시름없이 맥이 풀려 돌아오는 오빠를 볼
때마다 민망하고 안타까운 생각에 마음을 태우고 항상 우울한 심정으로 오늘도 오빠를 보내고 걱정하고 있었다.
때마침
노승이 와서 시주하기를 권하는지라 그 떄 노승에서 걱정 끝에, < 대사님 혹시나 봉덕사종이 완성되는 무슨 묘한 방법이라도 아시오니까?
> 하고 물었더니 그 노승은 대답하되, < 그 공사에는 인주가 꼭 필요하오. 순결한 여아를 인주로 세우지 않고는 그 공사는 이루지
못할 것이요. >
이와
같이 말한 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중이 사라진 후에 여자의 가슴은 큰 자극을 받아 그는 백 가지 천 가지 생각에 잠기었다.
그러나
세상에 어렵고도 어려운 것은 인주이다. 부모가 되고 자기 자식에 대한 자애심은 빈부귀천을 불문하고다 귀중한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 깊이깊이
생각한나머지 최후에 비참한 결심을 하여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이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느 딸을 인주로 바칠 것을 결심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빈곤과 싸우면서 오로지 오늘날까지 살아 온 것은 오직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날 때 남겨 주고 간 봉덕이를 생각하고 그 장래를 기대하여
유일한 낙으로 애정을 다하여 양육에 힘쓴 것이다. 이것이 그 여자의 생명이면 자기가 가진 이세상에서 사는 전부였던 것이다.
<
봉덕아 네가 외숙부를 위하고 돌아가신 너의 아버지를 위하여 이 불쌍한 어미를 위하여, 그 보다도 임금님을 위하고 만백성들의 근심을 풀기 위하여
신종의 인주로 네 몸을 바쳐 주려므나, 이 어미가 간청한다. > 하니 다섯살 되는 어린 봉덕은 그 뜻을 알았는지 다만 머리를 끄덕끄덕함
승락의 표시인듯 물끄러미 어머니를 쳐다보더니 웃음을 띄운다. 그 어머니는 마음을 목석같이 굳게 하고 그 오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전과
다름없이 기운을 잃고 오빠는 무거운 몸을 겨우 이끌고 파리한 몸 기진 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말이 없어도 종이 안됨을 짐작하였다. 그는 곧
오라버니에게 오늘의 내력 전부를 일일히 고한후 딸을 바칠 것을 말하였다. 오빠는 깜짝 놀라며 거절했다.
<
우리 남매는 이 세상에 나서 어느 누구보다도 눈물과 파란 곡절이 많았다. 네게는 없어서는 안 될 단 하나의 무남독녀 인데 어찌 인주로 하랴!
차라리 내가 죽을지라도 못한다고 > 하면서 반대하였다.
<
오라버님 오라버님, 오빠 없는 이 세상에 이 몸은 누구에게 의지를 하고 산단 말이요. 오빠가 희생되면 우리 두 목숨은 어찌 되오리까? 우리집은
멸망이 아니고 무엇이 되며 하루 인들어찌 산단 말이요. 부디부디 이 동생 말을 들어 주셔요 >하고 너무나 간곡한 청이기에 그 자리에
쓰리졌다.
그
이튿날 봉덕은 목욕시켜 제사지내고 마지막으로 안았다. 무심한 봉덕이는 빙글 빙글 웃고 엄마 엄마 부른다. 사랑하는 내 딸을 회생시킬 생각을 할제
그 어머니의 가슴 어떠하였으랴.
그러나
한 번 결심한 일, 어린 봉덕에게 최후로 < 봉덕아 어머니를 원망해라. 너는 나와 너의 외삼촌을 위하여 우리보다 먼저 부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니 그리알고 구슬같은 눈물을 씻으며 쇳물이 펄펄 끓는 도가니에 던져 넣고 말았다.
그
때 봉덕은 에밀레 에밀레 부르면서 이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신기스럽게도 이번 만든 종은 훌륭한 종이 되었다. 시험삼아 종을 울리니 그 소리는
그윽하고 애련한 울음, 마치 그 것은 봉덕이가 에밀레 에밀레 하고 부르는 처량한 소리와도 같이 들여왔다. 여러 사람들은 옷깃을 가다듬어 죽은
봉덕의 명복을 빌며 합장 재배하고 종소리가 끝나도록 헤어질 줄 몰랐다고 하며,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만인이 소원하던 신종이 완공되어 신라
시대는 물론 우리 나라의 훌륭한 자랑거리를 세계에 알리고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손 시양 (孫氏揚)
의 효도 (孝道)
지금으로부터
약 일천 수백 년 전 신라 시대의 이야기, 양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물론 돌아가신 후 에도 아래와 같은 보통 사람이 못할 행동을 하여 오늘날까지
그 유적이 비문에 남아 있다.
경주시
황남동 길가에 효자리라는 비각도 없이 눈, 비, 바람을 맞아가며 쓸쓸히 서 있는 사각으로 된 돌이 우뚝하게 서 있다. 그 비문은 오래 풍파와
뭇사람의 장난으로 글자가 똑똑하지 못하나 그 내용인즉 이러하다.
손
시양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 삼 년상을 자기집을 떠나 부모의 시체와같이 산에 가서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그 죽은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마음으로 공양하였다. 다시 말하면 두 부모상을 육 년 동안 고기 반찬이나 술 같은 것은 물론 맛좋은 음식, 좋은 의복, 호사한 놀이 등 좋은
것은 다 금하고 산채나 풀 등으로 반찬하고, 자기손으로 밥을 지어 산소에 올린 후 식사하고 모든 오락이며 주색을 다 버리고 지내는 그 고통이야
말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범이 밤마다 나타나서 여막을 흔들기도 하고 놀라게도 했으나, 효성이 지극하니 무서운 것이나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범이 친구같이 되어서 한집 사람 모양으로 되고 오히려 보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신중이라
밤이면 인적기가 없으며 적적할 것은 물론 일년가도 찾아오는 친구며 손님도 없고 물론 요즘처럼 신문이나 라디오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며 고통과
슬픈 마음 비할때 없었을 것이다.
인관 (印觀)
과 서조 (署調)
지금으로부터
약 1600여 년 전일이다.
지금
같이 돈이 있지 않고 물건과 물건으로 팔고 사고하던 물물교환 시대에 인관이라는 사람과 서조라는 사람이 서울장안에 가서 서조는 인관에게 곡식을
팔고 인관은 서조에게 솜을 팔았다.
그
때 서로 물건을 바꾸어 각각 자기 집으로 실어 갔다. 그런데 어느날 솔개가 서조의 집에 있는 솜을 인관의 집으로 물어 들였다. 인관은 원래
정직한 사람이라 서조를 찾아가 솔개의 장난으로 당신의 솜이 우리 집으로 와 있으니 가져가라고 말하였다.
서조가
말하기를, < 짐승의 짓이라고는 하지마는 팔았던 물건이 다시 당신에게로 가게 된 것은 반드시 하느님이 주시는 복이라 내가 당신의 복을 대신
받을 수 없다. >
하고
거절을 하자인관은 < 그렇다면 나도 당신이 판 곡식을 가질 수 없다. >고 하며 시장으로 물건을 가져갔다. 그러나 서조는 <
곡식을 판지 이미 사흘이나 지났으니, 내가 받을 권리가 없소. > 하고 또한 거절을 하였다. 하는 수 없이 두 사람은 솜과 곡식을 시장에
놓은 채 자기 집으로 각각 돌아갔다. 뒤에 장일을 맡아 보는 관리가 이 사실을 알고 임금께 보고하였더니 정직한 사람들이 두 분에게 상을 주어
표창했다고 한다.
태자 (太子)
와 신충 (信忠)
지금으로부터
천 수백 년 전 신라 제 34대 효성왕이 태자로 있을 때 신충이라는 친구와 서로 측백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면서 신충이가 말하되,
<
뒷날 나는 너와 놀던 일을 잊지 않고 그 우정으로써 너를 도울 것이니 너도 나를 잊지 말라. >
<
암 잊을 리가 있겠느냐? > 둘이서 굳은 약속을 하였다. 뒤에 태자는 임금님이 되어 여러 신하에게 상을 베풀 적에 신충은 빠지고
말았다.
신충은
한탄해서 노래를 지어 측백나무 가지에 붙었더니 그만 측백나무가 말라 버리고 말았다. 효성왕은 이상히 여겨 측백나무가 자세히 살펴본즉 신충이가
지은 노래가 붙어 있었다. 깜짝 놀라며 옛 맹서를 잊은 것을 사과하고 신충에게 벼슬을 내리었더니 측백나무는 다시금살아났다고 한다.
연오랑 (延烏郞)
과 세오녀 (細烏女)
신라
제8대 아달아왕이 즉위한 지 4 년 정유년 에 서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는 젊은 남자 연오랑과 그의 아내 세오녀가
농사짓는 한편 고기잡이로 넉넉지는 못하나마 금실좋게 그날 그날을 행복스럽게 살고 있엇다.
연오랑이
고기잡이를 가면 세오녀는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김매고 거두어 저녁때가 되면 바다에 돌아오는 남편을 반갑게 맞아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저녁을 함께 먹는 것이 그들의 돌도 없는 즐거운 일이었다.
때로는
둘이서 바다로 가서 고기잡이하는 남편을 도와 그물도 잡아 주고 혹은 밭에 나란히 나가 힘든 일을 남편이 거들어 주기도 하였다.
때는
가을 공기 좋고 일기 좋은 청명한 날 아내가 밭으로 곡식을 거두러 나가고 남편은 낚싯대를 가지고 바다로 갔다.
그러나,
오늘 만은 왠일인지 도무지 고기가 물리지 않아서 황혼이 저문 석양에 연오랑은 짜증과 슬며시 화가 나는 지라 돌팔매를 치며 일어서서 바다를
바라다보니 난데없는 커다란 바위가 둥실둥실 자기 앞으로 떠내려 왔다. 하도 괴상하여 그 바위에 올라 보았다. 그랫더니 그 바위는 파도를 따라
점점 바다 가운데 들어갔다. 그 때서야 겁이 나서 이제왔으나 이미 늦어 하는 수 없이 바위에 올라타고 집동 같은 파도와 싸우며 구원을 소리높이
질렀으나 파도소리와 끼- 끼하는 갈매기 소리만이 외롭게 들릴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기진맥진하여
나중에는 잠이 들고 말았다. 이 바위도 흘러 흘러 어언간 일본 어떤 땅에 닿았다.
이
땅 사람들은 바위를 타고 온 이라면 이는 반드시 하늘이 보내신 신인 틀림없으니 우리의 국왕으로 모시자고 하여 곧 그곳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세오녀는
그날 저녁밥을 지어 놓고 아무리 기다려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별별 생각을 다 하다가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비참한 심사와 험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떨어지지 않아서 문득 미친듯 바닷가로 뛰어 나갔다.
이곳
저곳 찾아보았으나 이미 밥은 '밤은 깊어가고 추야월은 교교히 낮같이 밝고 사방은 고요 적적하며 사람은 없고 단지 자기 그림자만 있을 뿐이었다.
어지러운 마음 어찌할바 몰라 심중 교란할 때 문득 바위가 보이는데 그 바위에는 자기 남편의 신발이 분명히 보였다.
아아!
이 일이 웬일이오. 그러면 물이 빠져 죽었단 말인가. 설말 그러한 불길한 일이 오지 않으리라 했으나 신발이 눈앞에 똑똑히 있지 않으냐! 어지러운
생각에 잠길 때, 무심한 갈매기는 떠돌고 밀려오는 파도소리만 세오녀를 비웃는 듯 철석철석 모래물에 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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